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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을 잃어버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한 첫 날, 공항에서 가방을 잃어버렸다.


1. 가방 안에는 맥북과 태블릿, 현금 100만원이 들어있었다. 공항 경찰에 신고하고, 범인의 얼굴이 찍힌 cctv를 확보했다. 공항에서는 다른 관할 경찰서에 케이스를 넘긴다며, 가방을 찾으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공항 경찰이 3시간동안 독수리 타법으로 작성한 내 사건 리포트

무심한 경찰과 사건 신고를 도와준 친구 파즈의 어머니 애나

2.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아름다운 숙소와 동네 풍경, 가을날의 선선한 날씨, 저렴한 물가 등 노트북과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만 빼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이 때문에 슬픔은 더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 밖에 없다는 사실에 무력감이 밀려왔다.

친구 Paz의 오빠가 해외여행 갈 때 빈 숙소를 임시로 빌려주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가을

3. 해외 어디에서든 살 수 있다고 느낀 것은 맥북 덕분이었다. 맥북으로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었고, 클라이언트와 수강생과 영상통화로 만날 수 있었으며, 국내에 출판된 책을 구매하고 각종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맥북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맥북을 잃고서야 깨달았다.

4. 2일 정도 지나자, 맥북을 새로 구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해야하는 일도 많고, 상실감을 이겨내야 했다. 도심의 애플스토어에 가자 내 맥북 기종이 한국 가격의 2배에 가까운 460만원이다. 아르헨티나에 수입되는 해외 제품들은 많은 세금이 붙는데 애플은 80%가 넘는 세금이 더해진다. 여기서 맥북을 사느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고 그 곳에서 맥북을 구매해 돌아오는 것이 저렴하다.

5. 중고 맥북을 구매하기로 하고 현지 친구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도 WeWork를 포함 멋진 코워킹 스페이스가 많은데, 그 쪽에도 노트북을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피씨방은 저렴하지만, 그 곳에서 일은 하고 싶지 않고- 도서관들은 컴퓨터를 제공하지 않는다.

6. 스마트폰과 노트북이 없던 시절, 세계여행이나 장기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했을까?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고 사진을 가끔 찍고… 한비야처럼 글을 썼을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는 여행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 안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는- 일을 하고 블로그든 영상이든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7. 범인 얼굴이 cctv에 잡혔는데, 왜 빠르게 잡지 못하는 건지 경찰에게 물어보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하루에도 2000건씩 강도 살인 사건이 일어나 단순 절도에는 시간을 많이 쓸 수 없다고 한다. 범인은 내 맥북을 열어보긴 했을까? 자판도 한글이라 중고 판매도 번거로울텐데 측은지심에 돌려줄 가능성은 없을까…

8. 이렇게 된 김에 아르헨티나 소고기와 말벡 와인을 왕창 마시며 여행에 집중한다!! 라고 쿨하게 말하고 싶지만.. 이미 나는 뼛속까지 디지털 세대이다. 맥북이 없으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방랑자인 것이다. 중고를 사면 이 허한 마음이 조금 사라질까. 추후라도 범인을 잡아 맥북이 돌아온다면 더 많이 아껴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예뻐해줄 것이다.

2 Comments

  1. 맥북은 찾았는지요? 이런 프로젝트를 보면 부럽고 부럽네요. 내후년 1년쯤 여행자로서 서울 아닌 유럽의 도시에서 서성거리고 싶은데…
    ㅎㅎ
    간결하고 심플한 기사와 사진, 가계부 등 차분한 정보가
    참 좋네요~~
    응원합니다

    1. 안녕하세요! 응원 감사합니다. 노트북은 결국 찾지 못하고 현재 칠레 산티아고에 있습니다.
      도난사건을 수습하느라 블로그 글이 늦었네요.
      승주님의 여정도 응원합니다. 분명 저보다 더 알차고 재미있는 여행 하실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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