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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 아이레스 – 4주 간의 기록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통화 가치의 폭락으로 도시의 활기보다는 사람들의 불신과 무력함이 크게 느껴졌다.

1- 미워하는 마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한 첫 날, 공항에서 노트북이 든 가방을 잊어버렸다. 이 때문에 도시에서 지낸 한 달동안 여행은 커녕, 경찰서에 방문하고 사건을 수습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3번 방문한 경찰서

공항에서 범인의 얼굴이 CCTV에 잡히고, 범인이 내 노트북을 사용한 거주지가 icloud에 노출되었을 때는 가방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관할 경찰서는 3주 내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3번이나 방문한 동네 경찰서에서는 관할서에 문의하라는 말 뿐이었다. 한국 대사관에도 여러번 연락을 했으나, 관할서에 도움을 요청하겠다는 답변 뿐이었다.

범인의 얼굴과 위치를 아는데 경찰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에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고, 나중에는 화가 났다. 그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범인을 만나서 돈을 주고서라도 노트북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었지만, 동네 주변의 꽃집 아주머니와 세탁소 아저씨가 위험하다며 극구 말렸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경찰의 협조없이 아이폰을 훔쳐간 범인을 추적하다 총에 맞은 사람이 있다.)

​어느 순간 가방을 찾는 것을 체념했지만, 도시를 미워하게 되었다. 경찰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해결될 수 있는 사건인데, 전화조차 받지 않고 이에 대해 무기력하게 어쩔 수 없다고만 말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미웠다.

2- 치안

내가 경찰에 분노할 때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아르헨티나는 하루에도 몇 천 건씩 강도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야. 강도들이 총을 들고 위협하는 곳이라고. 경찰들은 단순 도난 사건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뿐더러, 너 혼자 수색하다보면 정말 위험한 상황에 빠질수도 있어”

내 숙소는 벨그라노 지역에 위치해 있다. 여기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부유한 동네 중 하나로, 서울로 보면 압구정, 신사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고급스러운 아파트와 레스토랑, 카페들이 거리를 따라 질서있게 놓여져있다. 안전하고 부유한 동네에 지내서인지 사람들의 말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

벨그라노 동네 풍경

버스 내부의 모습
거리의 모습

뉴스 기사를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아르헨티나에서는 강도의 위험 때문에 가게나 레스토랑에서 사설 경찰을 따로 고용한다고 한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금까지 방문했던 동네 가게들 앞에 경찰들이 서있었다. 장사를 하면서 경찰을 고용할 만큼 치안을 나쁘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몇몇 가게에서는 주인이 유리문 밖으로 손님을 확인하고 수동으로 문을 열어주었는데 이것도 강도의 위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한국에서 큰 사건사고 없이 안전한 사회에서 자랐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겪은 상처와 공포를 모른 채 내 도난 사건을 수사하지 않는다고 칭얼된 것이다.

3- 자동차와 소음

아르헨티나에 오기 전 유럽에서 5개월을 지냈다. 유럽에서는 주말에 1~2시간 정도 걸어서 유적지나 갤러리를 가는 방식으로 여행을 했다. 목적지를 따라 걷는 동안 도시의 다채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고, 예상치못한 아름다운 공간을 만나기도 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여행을 하려 했으나, 도시의 자동차가 너무 많다. 모든 길에 자동차 도로가 넓게 뻗어있고, 배기 가스를 내뿜는 자동차들이 줄지어 달린다. 울창한 가로수길이나 공원을 걸어도 옆에서 부르릉거리는 자동차들로 곧 피곤함을 느꼈다. 대중교통을 타는 것은 더 고역이었는데, 좁고 노후화된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마음이 더 심난해졌다.

4- 소고기와 와인

여행을 하고 싶은 욕구를 잃고, 한 달동안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동네에는 정육점과 과일 가게, 세련된 와인샵들이 여러개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질 좋은 소고기나 와인, 과일이 서울의 1/3~1/4 가격이다.

정육점

치즈 & 와인샵

과일 & 야채가게

가방을 잃어버려 많은 금전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소고기와 와인, 아보카도와 같은 값진 과일로 끼니를 이어간(?) 한 달이었다. 아늑한 숙소에서 술을 마실 때면 “가방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완벽했을까” 하는 어리석은 마음에 슬퍼지곤 했다.

한 달 동안 지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 숙소. 친구 Paz의 오빠가 여행간 동안 집을 독채로 빌려주었다.

음주의 기록들

5- 굿바이, 부에노스 아이레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는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통화 가치의 폭락으로 도시의 활기보다는 사람들의 불신과 무력함이 크게 느껴졌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고 자란 친구 Paz는 현재 젊은이들은 직장을 구할수도 없고, 직장을 구한다해도 페소가치 하락과 인플레이션때문에 월급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체념하듯 말했다.

국가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 단순히 여행의 목적으로 도시를 방문한 것이 내심 부끄러웠다. 개인의 삶을 넘어, 정치와 경제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었다.

마지막날, 숙소 건물의 관리자인 Dario에게 양말을 선물했다. Dario는 숙소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성심성의껏 도움을 주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친절하고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언어를 모르는 이방인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나도 다른 이방인에게 같은 친절을 베풀겠다고 결심한다.

나의 침울함을 견뎌주었던 친구 Paz

언제나 멋진 미소를 선물했던 건물 관리인 Dario

으-좋은 기억과 배움만 간직해야지. 다사다난한 한 달이었다.

2 Comments

  1. INTP AB형 저랑 똑같네요 ㅎㅎ 유튜브에서 현지 영상은 안 보여주고 한달 총 비용만 말씀해주시는거 보고 ㅋㅋㅋ
    아르헨티나 여자 혼자 간게 대단한거에요 중남미는 정말 치안 안 좋죠 아무튼 남은기간 조심하시길 바래요

    1. 앗 한달비용만 말하는게 INTP의 특징인가요 ㅋㅋ 블링블링한 감성이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ㅠ_ㅠ 아르헨티나에서 고생해서 남미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네요. 블로그 방문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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